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괄의 난 (문단 편집) === 마탄 전투 === 황주에서 패배한 것은 정충신의 선봉대 뿐으로, 관군의 포위망은 아직도 건재했다. 또한 이괄 군이 한성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영변에서 황주까지 진군해왔던 거리보다 먼 거리를 가야 했다. 따라서 황주 전투 이후에도 이괄은 소모전을 피해서 오솔길을 골라 진군하고, 정충신은 이괄의 뒤를 지독하게 추적했으며, 장만의 본대는 투항병들과 패잔병을 추스려 봉산 남서쪽 서흥에서 평안도 병마 절도사 이수일과 합류하는 전개가 이어진다. 이괄 군은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각 지역의 관군보다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한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예성강을 건너야 했으므로 스스로 사지를 돌파해야 했다. 때문에 관군은 예성강을 방어선으로 설정하여 방어사 이중로 등의 방어군이 강을 지키고, 정충신의 추격 부대와 장만의 관군이 뒤에서 협공을 가해 이괄 군을 포위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괄 군이 예성강을 건너게 된다면 개성이 지척일 뿐 아니라 계속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기 때문에 관군의 입장에서 예성강은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지점이었다. 설령 이괄 군을 섬멸하지 못한다고 할 지라도 방어선이 제대로 형성되어 삼남(충청, 전라, 경상)의 병사들이 집결하는 시간만 벌 수 있다면 이괄의 반란은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2월 7일에 전라도 병마 절도사 이경직이, 2월 9일에 충청도 병마 절도사 이완이 병사를 이끌고 올라왔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미 2월 7일에 관군이 마탄에서 대패하고 한양까지 한번에 뚫리는 바람에 구심점을 잃은 상황이었다.] 결국 이괄은 최대한 소모전을 피하고 신속하게 강을 건너기 위해 [[예성강]] 상류인 마탄(馬灘)으로 이동한다. 이중로 또한 이괄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마탄에서 미리 병력을 결집했다. 문제는 황해도 지방군이 나름대로 훈련 수준이 높았다고는 하지만 이괄 군에 합류한 북방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데다가, 지원군이라고 도착한 경기도 지방군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하루에 160리나 되는 거리를 강행군한 끝에 겨우 도착한 상황이라 절대로 싸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이들의 후방에는 재편성을 마친 정충신 군[* 모자라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이괄 군 투항자들까지 그대로 뽑아 올릴 정도로 반란군에 비하면 숫자와 훈련도가 부족했다.]이 이괄을 뒤따라 오고 있었지만, 당시는 한 겨울인 데다가 이괄 군이 앞서 진격하면서 식량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불살랐고 배후에는 항상 복병을 두어 10리간의 간격을 유지했다. 게다가 이괄 군의 진로가 험악한 산길이었기에 그 뒤를 뒤따르는 정충신 군의 고생은 엄청났고, 결국 지치고 굶주린 정충신 군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장만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 병사들이 먼 거리를 행군하여 피곤하니 안타깝고 염려된다고 썼을 지경이다. 결국 2월 7일, 마탄에서 관군은 이괄의 기습으로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고 [[인조]]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황주 전투와 마찬가지로, 마탄의 수비군 자체가 이괄 군에 비하면 질과 양이 모두 빈약한 병력이라서 패배는 확정이었다. 하지만 마탄 전투는 황주 때와는 달리 관군이 전멸해버렸고, 죽은 장수들이 임진왜란부터 활약한 베테랑 장교들이자, 순수하게 국가의 위기 사태를 방지하겠다고 목숨을 바친 [[충신]]들이라서 굉장한 파장을 일으켰다.] 전투의 양상은 황주 전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괄 군은 기동력, 훈련도, 숫자까지 관군을 크게 웃돌았고, 순식간에 얕은 여울을 건너 관군을 격파해 버린다. 이중로를 포함한 8명의 장수들은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강을 건넌 이괄 군이 역으로 관군을 강쪽으로 몰아서 포위해 버려 전멸한다. 도망치다가 강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항복했다고 하며 관군을 이끌던 장수들이 7명이나 전사했다. 이 중 이중로는 직접 [[조총#s-1|조총]]으로 군관 7명을 쏴 죽였다(擊殺)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을 정도니 전투가 얼마나 처참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저격(狙撃)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격살은 총으로 저격해 죽였다는 의미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논란이 있다. 본 문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변역한 조선 왕조 실록을 참조하고 있다.] 그나마 살아남은 평산 부사 이확(李廓)은 자신의 말을 일부러 죽인 뒤 피를 바르고 밑에 숨어 [[죽은 척]] 해서 살아남았을 정도니 관군의 참상에 대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확의 행동이 겁쟁이처럼 보일수 있겠으나 이확은 젊은 시절 궁궐에 침입한 호랑이를 죽인 용사중의 용사였다.][* 이 패전으로 이확은 죽을 고생을 하고 겨우 목숨만 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괄 군과 내통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받아 이를 해명하기 위해 고생했다. 그리고 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나라의 원수인 청 황제한테 절하고 왔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 훗날 해명이 될 때까지 두고두고 까이게 된다.] 이괄은 전사한 관군의 충성파 장수 7명의 목을 베어 뒤늦게 도착한 추격군에게 보내 일시적인 공황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를 본 남이흥이 "잡혀간 우리 장수는 나와 잘 아는 자들이다. 이 얼굴들을 보니 모두 장수가 아니다. 틀림없이 군졸들의 머리인데 적이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다." 라고 둘러대는 기지를 발휘하여 사기가 떨어지는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물론 충성스러운 장수들이 7명이나 사망하고 반란군에게 [[효수]]까지 당한 사건으로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괄의 난에서 죽은 선전관이나 이괄의 처자식들과 함께 대표적인 비극으로 언급된다. 결국 충성파 장수들의 목을 베어서 욕보이는 계책을 냈던 이수백은 이후 그 장수들의 아들들에게 백주 대낮에 참살당한다. 같이 계책을 냈던 부장들과는 달리 죽어도 싼 인물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